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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생애와 사망 한 많은 일생

사랑에빠진션 2021. 6. 18. 11:56

유관순의 생애

 

 

1902년 12월 16일 충남 목천군(지금의 천안), 소작농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살던 고향은 철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서울과 충남 공주를 연결하던 교통로였기 때문에 개신교 신자들이 선교 활동을 하던 곳이었죠. 할아버지와 숙부는 일찌기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레 유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집안이 되었습니다.

 

1907년 일본인이 유관순이 다니던 교회를 태웠고 6촌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다시 교회를 세웠습니다. 유관순은 3남 2녀 중 둘째이며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랐습니다. 어려서부터 리더쉽이 강하고 씩씩한 장난을 좋아하며 남을 도와주는것을 좋아했습니다.

 

1916년 공주 여학교 시절 지령리 교회를 찾아오던 신도의 추천을 받아 이화학당에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었습니다. 유관순의 밝고 다정한 모습에 친구들도 점점 많아졌으며 한번은 저녁식사를 매일 안먹던 유관순을 이상하게 여겨 선생님이 추궁하자 같은 반 친구 하나가 식비를 못내 친구 대신 한끼를 굶기로 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잔다르크

 

독서를 즐겼고 많은책을 읽었습니다. 유관순이 즐거 읽던 책은 1907년에 출간 된 [애국부인전]인데요. 이 책은 잔다르크의 이야기로 유관순의 가슴속에 있던 정의감에 도화선이 된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이 날때마다 기도실에서 기도할 정도로 신앙이 깊었습니다.

 

1918년 고등과 1학년으로 진학하여 학기 중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방학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동네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고종황제

 

1919년 고종 황제가 서거하고 고종은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의 사망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식혜를 먹고 죽었고 고종이 승하하고 바로 식혜를 올린 궁녀 두명이 살해를 당해 사건은 더 미궁속으로 빠지게 되었죠.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유관순은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1919년 3. 1. 오후 2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 선언식을 갖었고 공원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화학당 학생들도 동요해 나아가려 했지만 교장선생님은 교문을 막아섰지요. 하지만 유관순 외 몇 명은 뒷 담을 넘어 합류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다음날부터 확산되어 3.14.까지 2주 동안 전국적으로 276차례의 만세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1919. 3. 5. 남대문역에서 열린 학생들만의 가두시위에서 시위에 참석했다가 일본 순사에게 잡히게 됩니다. 경무총감부에 끌려 갔다가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되었고 1910. 3. 10. 전국적으로 학교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1919. 3. 31. 봉화를 통해 매봉산 꼭대기에 올라가 횃불을 들어 올렸습니다.

 

1919. 4. 1. 아우네 장터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몰래 나눠주고 쌀가마니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품속에 있던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민국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때 일제 헌병이 발포령을 내렸고 유관순의 부모님과 30여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으며 부상자는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유관순이 다니던 교회                                                                                   이화학당

 

3.1 과 관계가 깊은 유관순

유관순은 이화 학당 1학년 학생이었고 3.1 운동 때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일본 순사에게 잃고 만세 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우네 장터로 내려와 4.1 에 만세 운동을 벌였는데 그 때가 음력으로 3.1 이었습니다. 1920년 3.1 감옥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틈만 나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만세운동을 했기 때문에 지하 독방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지하 독방은 허리를 펼 수 없는 폐쇄적인 공간이었고 화장실도 별도로 없어서 매우 열악한 곳이었어요.

 

유관순 사망

 

 

1908년 의병 투쟁이 극에 달했을 때 의병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경성 감옥입니다. 1923년 독립 투쟁이 더욱 더 뜨거워지자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을 바꾸고 확장하였습니다. 바로 유관순 열사가 사망한 곳입니다. 5명의 인원을 수용하는 감옥에 35명을 수용했다고 합니다. 바닥에 누워서 잘 수가 없었대요.

 

유관순은 모진 고문을 당하며 독방에 갖혀 있다가 사망하였는데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1919년 6월 : 체포되어 5년형 확정, 항소 후 3년 형으로 줄음

1920년 : 특별사면으로 1년 6개월로 감형 확정

출소일 : 1920. 9. 30

사망일 : 1920. 9. 28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

사망원인 : 정확한 사망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자궁과 방광파열 혹은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으로 갑상선기능저하증 추정

 

이틀만 견뎠더라면 좋았을 것을 못 견디고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화학당의 외국인 선생님은 일본측에 시신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참혹한 고문의 흔적 때문에 요구를 거절합니다. 선생님은 시신 안내어 주면 미국에 알려 세계에 폭로하겠다고 항의하였고 일본은 해외언론에 알리지 말 것과 장례는 조용히 치를것을 조건으로 시신을 내어주었다고 합니다. 유관순열사는 교회에서 장례를 치렀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사망후 25년뒤 1945년 광복을 맞았고

1947년 유관순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 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어

1962년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되었습니다.

 

 

유관순 어록

5월 9일 1심 재판에서 한말입니다.

제 나라를 되 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를 사용해 내 민족을 죽이느냐.

왜 제 나라 독립을 위해서 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느냐.

왜 평화적으로 아무런 무기를 갖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 아니냐.

자유는 하늘이 내려준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빼앗을 수 없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립하는 그 순간까지 죽는 한이 있어도 만세를 부를것이다.

나는 도둑을 몰아내려 했을뿐이오. 남의 나라를 빼앗은 당신들이 도둑이 아니면 무어란 말이오.

 

당시 18살 꽃다운 나이였고 18세의 나이에 연약한 어린 여자 아이가 어떻게 저렇게 용감한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